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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고픈 이야기

부활절에 대한 개혁주의적 사명, (Easter가 아닌 Resurrection으로)

by 조이플 교회 2019. 4. 17.


부활절에 대한 개혁주의적 사명 


이신구 목사

개혁주의란,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잘못된 것을 고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바꿔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적응하며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관습에 젖어 지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습관성 행동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의 양심을 약하게 하거나 무뎌지게 해서 유전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결국엔 비판 없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서게 되고 또 그것을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8-9에서 이사야 29:13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세운 방법이나 교훈이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과감히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사명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면서 발견한 언약책을 읽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명하신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열왕기하 22:23)라는 말씀처럼 약 500년 만에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인도로 사로잡혔다가 2차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수아 때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나서야 초막절을 지키는 개혁을 이루었는데 바로 에스라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아 알고 실행한 것이었습니다(느헤미야 8:17).  


이처럼 5백 년 혹은 천 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절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인류의 역사를 거울삼아,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부활절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단지 바르게 믿고 바르게 행동하려는 몸부림으로 감히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잔잔한 호수에 부활절을 되찾자는 외침의 돌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잔잔하지만 그 물결로 주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과 그 이후의 역사의 흔적을 살펴 되돌려 놓아야 할 부활절에 인류가 잘못 범하고 있는 실수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 보려는 노력을 시도해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외침이 있다고 해서 큰 바위처럼 굳어진 부활절의 관습을 금방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자문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인류는 하나님을 잘 섬겨온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된 유월절을 5백년 만에 지켰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지켜보지 않은 초막절을 천 년 만에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인류는 자신들의 습성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변형하거나 지킨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단이 노리는 술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역사를 알면서도 확실한 역사를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오백 년, 천 년에 이어 이천 년의 역사를 바로 잡을 때라고 믿습니다. 


지금 세계는 이스터의 열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니 Easter Egg Hunter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스터는 부활절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부활절에서 점점 예수님과 부활(Resurrection)이 사라지고 이스터의 축제 속에 등장하는 달걀과 토끼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예견된 결과이며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누군가에 의하여 오래전부터 조작되거나 계획되어진 모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부활절의 영어표기가 Resurrection이 아니고 Easter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냥 당연한 것이고 교회에서 Happy Easter라고 하고 달걀에 색깔을 칠해서 나눠 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가 보다라고 여기며 속았던 것을 아닐까요? 달걀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부활이라고 여겨왔지만, 사실 그것은 부활(復活)이 아니라 부화(孵化)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달걀을 깨고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죽음인 무덤을 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럼 왜 부활절이 이스터가 되었고 달걀이 그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5세기경 소크라테스는 “이스터(부활절) 축제가 준수되었다는 지적이 신약 성경이나 사도 교부들의 기록 어디에도 없다. 주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이것(부활절)이나 다른 축제를 명하신 적이 없다. 이스터(부활절)도 많은 다른 관습이 그렇게 수립된 것처럼 교회가 이교의 옛 용어를 바꾸어 영구하게 한 것으로 돌려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카톨릭백과사전에서도 “사람들은 부활절 날 부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붉게 칠한 달걀을 상에 가져왔다.…이 관습은 그 기원을 이교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경축하는 많은 이교 관습들이 부활절과 접목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교회가 이교의 옛 용어를 바꾸어 사용했다거나 이교의 관습이 들어왔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Easter라는 용어는 철저히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Easter는 고대 앵글로 색슨족들이 섬겨 온 봄의 여신으로 섬겨 온 Ostara이며, 이는 또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멸하라고 하신 가나안 여신 아스다롯(삿2:13, 삼상7:3,4, 왕상11:5,33)과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여신 Ishtar의 다른 표기이기 때문입니다(The World Book Encyclopedia p.787-788). 옥스퍼드 사전에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크리스마스처럼, 고대 이교의 축제를 대신한 것임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문헌들이 Easter의 역사를 부활절보다는 여신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지켜졌던 부활절은 오늘날 우리의 것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때는 감히 부활절을 Easter라고 부르지도 여신이 다산의 상징으로 낳았다는 달걀과 그것을 옮기는 토끼를 부활의 상징이라고 교회 안에 들여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중,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전할 때 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이교도들의 의식을 접목시키려 했던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신교의 의식에 기독교의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부활을 전하기 위하여 가볍게 시작했던 생각이 점점 기독교의 부활절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위키백과). 


그렇다면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우리가 해야 할 부활에 대한 사명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우리가 잘못 알고 잘못 행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곧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이번 부활절에도 예수님이 없는 부활절을 여신의 이름을 외치며 여신이 퍼뜨리는 달걀을 나누면서 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조이플 교회

(2019년 부활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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