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이신구 목사
Ⅰ.
사사기 2:13에서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섬긴 이방신이 바로 바알과 아스다롯이었습니다. 아스다롯은 여신의 이름인데 사도행전 19:24에 등장하는 아데미가 이 여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스다롯은 고대 북유럽에서 봄의 여신이자 풍요와 다산의 신인 에오스터(Eoster)와 같은 이름입니다. 이는 또한 고대 영국의 색슨족이 오늘날 쓰고 있는 이스터(Easter)입니다. 이스터 여신에 대한 축제는 4월에 행해졌는데, 다산을 상징하는 토끼와 재생을 상징하는 달걀로 지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부활절을 영어로 Easter 혹은 Easter day라고 표기할까요? 분명 성경에서 우상으로 밝혀진 여신의 또 다른 이름인데 말입니다. 더군다나 많은 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달걀을 부활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사용해 왔으니 말입니다. 분명히 부활을 뜻하는 Resurrection day라는 단어가 있는데도 많은 교회들은 Easter라고 표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이교도의 봄 축제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에 접목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까지 지켜오고 있는 이스터 데이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이교도의 풍습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면 모두 놀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부활을 가리키는 단어는 Resurrection이지 결코 이스터(Easter)는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이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여신을 숭배하던 우상숭배의 관습을 접목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달걀을 나누면서 병아리가 부화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요즈음 달걀은 병아리가 부화할 수 없는 무정란이 대부분입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달걀을 나누면서
병아리가 부화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바빌론 신화에는 하늘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큰 달걀이 떨어져 그 속에서 여신이 부화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고대 바빌론 사람들에게 달걀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이스터 여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의 부활절에 우상숭배의 요소가 자리를 잡았을까요? 그것은 이미 오래전 비록 우상숭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기독교화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카톨릭 학자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교도들이 달걀을 사용했지만 무덤 앞에 놓인 큰 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 그리스도인들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2:30에서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Ⅱ.
가나안 정복이후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크나 큰 실수이며 죄악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부활절을 지키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부활이라는 Resurrection 단어를 버리고 여신 아스다롯의 영어식 표기인 Easter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역시 해결해야 할 잘못된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이스터 여신의 상징인 달걀을 예수님 부활의 상징이라고 내세워 부활절에 접목시켜 왔던 지난 모든 역사도 회개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달걀이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온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무덤 앞에 놓인 큰 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면 문제없지 않겠느냐는 어리석은 해석을 내놓은 일일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 구별 없이 섬기며 나간다면,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기 시작한 죄를 또 다시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이룬 훌륭한 일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사무엘상 7:4). 어찌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 날마다 개혁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섬기려는 자들이 비난을 받는 모양새입니다. 오히려 너만 거룩한체 하지 말라는 비판을 많이 합니다. 모두가 다 하는데 혼자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하지 않으면 비난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
날마다 개혁해 가는 것
진실한 종 예레미야 선지자조차도 세상의 이런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시드기야 왕의 고관대신 중에 바스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하던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비난하다가 때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착고에 채웠다가 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원칙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필요한 신앙인은 예레미야와 같이 외로운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외로운 신앙인이 당신 자신이기를 주께서 원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절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활절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해피 이스터’라고 외치며 달걀을 나누는 기쁨으로는 부활절을 잘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온 것은 결코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화(孵化)일 뿐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무덤문을 깨뜨리시고 Resurrection(부활)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2018년 4월 1일, 8일 부활절 목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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